[꼬꼬무 찐리뷰] "내가 암매장한 시신들, 가족 품으로 돌아가길"…사형수가 전한 '영화숙·재생원' 비극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핵심 요약
- 사형수 신경호(가명)가 SBS '꼬꼬무'에 편지를 보내 영화숙·재생원의 비극을 폭로했다.
- 1960년대 부산 영화숙·재생원은 부랑아를 강제 수용하고 폭력과 노역으로 착취했다.
- 원장 이순영은 부산시와 위탁 계약을 맺고 원생들을 감시·폭행하게 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지난 22일 방송에서 '살인자의 편지-영화숙 재생원' 편을 다뤘다. 1990년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수감 중인 신경호(가명)가 제작진에 편지를 보내 1963년부터 1974년까지 부산의 영화숙과 재생원에서 겪은 일을 증언했다.
신경호는 편지에서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라며 "늦었지만 그곳의 진실을 밝히고자 용기를 가지고 서신을 드립니다"라고 밝혔다. 방송은 그의 편지와 당시 원생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1960년대 부산에서 벌어진 강제 수용과 폭력의 실상을 전했다.
강제 수용과 폭력의 실상
1961년 부산에서는 전쟁고아와 부랑아가 넘쳐났고, 영화숙과 재생원은 이들을 거두는 시설로 소개됐다. 그러나 1960년대 자갈치시장과 송도해수욕장, 해운대 등지에서 아이들이 남자들에게 끌려가 영화숙으로 강제 수용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유옥수(당시 7살)는 빵을 사준다는 말에 따라갔다가 영화숙에 갇혔고, 이근수(당시 12살)는 방범대원에게 삼남매가 잡혀갔다고 말했다.
영화숙 원장 이순영은 32살의 퇴역 군인이었다. 신경호는 그가 온 뒤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다고 편지에 썼다. 원생들은 좁은 방에서 칼잠을 자야 했고, 점호와 군대식 훈련, 구타와 체벌을 받았다. 유옥수는 이유 없이 맞는 것이 두려워 오줌을 지렸다고 증언했다.
저는 이 교도소에서 죽는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는 매일 속죄합니다.
— 신경호(가명)
돈을 위한 착취와 은폐
방송은 부산시가 수용 인원에 따라 지원금을 준 것이 강제 수용의 배경이라고 전했다. 남찬섭 동아대 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사회 정화'를 내세워 부랑아를 거리에서 밀어냈다고 설명했다. 이순영은 부산시와 '부랑인 노숙자 수용 보호 위탁' 계약을 맺었다.
원생들은 옥수수죽으로 하루를 버텼고, 돼지 막사 등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탈출하면 곡괭이 자루로 맞았고, 원생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잡아오는 '까마귀' 단속반도 있었다. 신경호는 어린 동생 7명을 뒷산에, 누나·형·아저씨 11명을 갈대밭에 암매장했다고 편지에 적었다.
1969년에는 미국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건너편에서 영화숙을 목격하고 부산시와 경찰에 실태를 고발했지만, 협박을 받았다고 방송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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