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김귀정 열사 사망 사건…"귀정이의 시신을 지켜라" 그들이 '진짜' 지켜내고자 한 것은?
친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한 친구들의 눈물겨운 사수 일지가 공개되었다.1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귀정이를 지켜라 - 35년간의 사수'라는 부제로 김귀정 열사 사망 사건을 조명했다.1991년 5월 어느 새벽, 수백 명의 청년들이 서울 명동의 백병원으로 모였다.
핵심 요약
- 1991년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시위 현장에서 숨진 뒤 친구들이 영안실을 지켰다
- 경찰은 단순 사고사라며 부검을 밀어붙였고 친구들은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 1995년 문민정부 시절 법원이 경찰 과잉진압에 의한 사망을 인정했다
1991년 5월 어느 새벽, 서울 명동 백병원 영안실 앞에 수백 명의 청년들이 모여 스크럼을 짰다. 이들은 몇 시간 전 숨진 스물여섯 살 대학생 김귀정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모인 성균관대 학생들이었다. 1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귀정이를 지켜라 - 35년간의 사수'라는 부제로 이 사건을 다뤘다.
경찰은 김귀정의 죽음을 단순 사고사로 판단하고 신속한 부검과 장례를 요구했으나, 친구들은 정확한 사망 경위를 밝혀달라고 맞섰다. 검찰은 사망 5시간 만에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했다.
영안실을 지킨 사수대
부검을 위한 시신 압수수색 영장 만료일이던 날 새벽 5시, 무장한 전경 1500여 명이 동원돼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과 돌을 던졌다. 경찰은 살수차로 최루액 물대포까지 쏘았지만 사수대는 끝까지 시신을 지켜냈다. 그러나 경찰은 영장을 재발부 받았고, 며칠 뒤 검찰과 부검의가 다시 찾아왔다.
부검을 완강히 반대했던 어머니는 친구들의 안위를 걱정해 결국 동의했다. 어머니는 "난 우리 딸 같은 일이 다시 생기는 것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1년 6월 7일 시작된 부검 결과는 검경의 주장과 같은 단순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나왔다.
압박 질식사에 이르게 된 선행 요인이 있었는데 그걸 밝히지 못했다는 게 아직도 부채감으로 남아, 송구하고 미안하다
— 당시 진상조사단 관계자
진상조사단과 뒤늦은 인정
검찰을 믿지 못한 사수대는 동문들에게 도움을 청해 진상조사단을 결성했다. 당시 집회에서 경찰이 손에 쥐고 던지는 사과탄을 맞은 채수진 학생이 증언했고, 현장을 찍은 학보사 기자도 증거 사진을 제보했다. 진상조사단은 과잉 진압에 의한 사망이 명백하다고 판단했으나 경찰과 검찰은 끝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3만여 명이 참여한 장례식에서 친구들은 빗속에 무릎을 꿇고 성균관대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유림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2년 뒤 출범한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국가는 "김귀정의 사망은 전경들의 직무집행상의 과실로 발생한 것"이라며 과잉진압으로 인한 사망을 인정했다. 사망 4년 만에 진실이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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